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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11일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백악관 집무실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기자회견을 열었다. 백악관 비서실 직속 정부효율부(DOGE) 수장으로서다. 그는 정장을 입지 않았고 머리엔 검은색 ‘마가’(MAGA·Make America Great Again·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모자를 썼다. 하지만 누구도 복장에 대해 질문하지 않았다. 더 눈길을 끈 것은 그의 네살짜리 아들이 ‘결단의 책상’에 기대 코를 파고 있는 장면이었다.

무담보무보증클린턴 행정부 때 노동부 장관을 역임한 경제학자 로버트 라이시는 “일론 머스크로 대표되는 막대한 부와 권력의 결합이 미국의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있다. 과두정치는 민주주의의 적”이라고 질타했다.
테슬라와 스페이스X 등 6개의 회사를 거느리고 있는 머스크는 한 달 동안 무려 1만명에 가까운 공무원을 해고했다. 남아공 출신에 선출직 대학생대환 공무원이 아닌 억만장자가 ‘트럼프 오른팔’로 연방정부에 막강한 영향력을 휘두르고 있는 셈이다. 머스크의 권력 장악을 일부에선 ‘행정부 쿠데타’라고 명명하고 있다.



특권계급론, 클라이브 해밀턴·마이라 해밀턴 지음, 유강은 옮김, 오월의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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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특권계급론’(원제 The Privileged Few)은 소수의 엘리트 특권계급이 자신의 이익과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어떻게 정치와 사회제도를 쥐락펴락하는지 속속들이 파헤친다. 그들이 어떻게 세상을 지배하는지, 또 특권을 어떻게 유지하고 강화하는지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까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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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스크는 전 세계 슈퍼리치 3000명에게 국경을 초월해 ‘글로벌 부유세’를 걷자는 움직임에도 공개 반대를 천명하며 정부가 아니라 자신 같은 기업가들이 부를 재할당하는 적임자라고 말했다. 정부 지출이 늘면 결국 저소득층에 부담이 간다는 논리를 폈지만 속내는 자신에게 부과될 수도 있는 천문학적인 세금을 원천 봉쇄하려는 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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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 부쿠레슈티 시민이 지난 3일 일론 머스크 그라피티가 그려진 벽화를 따라 걷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오른팔’로 부상한 머스크의 세계적인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AP = 연합뉴스]



머스크와 함께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는 슈퍼리치에는 마이크로소프트(MS) 제국을 세운 빌 게이츠도 있다. 그는 자신의 자선재단인 빌과멜린다게이츠재단을 통해 여러 질병에 대한 백신과 치료제 개발을 주도했다. 세계보건기구(WHO)에 예산의 10%에 해당하는 막대한 자금을 기부한다. 하지만 정작 코로나19 팬데믹이 터졌을 때 거대 제약업체의 이권을 수호하듯 이중적인 면모를 보였던 그다. WHO는 백신 접근성을 확대하기 위해 백신 특허를 미루려 했지만 게이츠의 반대에 무릎을 꿇었다.

이 책의 저자는 호주 찰스스터트대 공공윤리학 교수인 클라이브 해밀턴과 시드니대 비즈니스스쿨의 노동조직학 부교수인 마이라 해밀턴이다. 그 둘은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의 흔한 ‘무일푼 자수성가 신화’도 부정한다. 차고에서 무일푼으로 시작해 자신의 실력과 능력으로 테크 왕국을 세웠다는 스토리 말이다.
실제 게이츠는 ‘금수저’ 출신으로 아버지는 유명한 변호사였다. 머스크 아버지 역시 남아공의 유명 엔지니어로 광산도 소유하고 있던 부자였다. 저자는 “가난뱅이에서 부자가 된 전형적인 테크 기업가의 이야기는 꼼꼼히 조사해보면 허구인 경우가 많다”며 “게이츠와 머스크 같은 상징적 인물들은 전폭적으로 지원해주는, 연줄이 좋고 부유한 가족이 있었다”고 꼬집는다. 한 연구에서 밝혀진 것처럼 부모의 소득이 수학 실력보다 테크 세계에서 성공을 결정하는 더 중요한 요소라는 얘기다.
두 저자는 ‘21세기 자본’을 쓴 토마 피케티와 역작 ‘구별짓기’를 통해 현대 계급 사회를 폭로한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연구 성과를 자주 인용한다. 최상위 1%와 0.1%의 부가 압도적으로 증가한 현실에 주목한 경제학자가 피케티다. 최상위 0.1%는 자신들의 소득과 부를 근로소득인 연봉이 아니라 배당금이나 이자, 자본 이익 등 자본수익에서 끌어낸다. 불평등이 더 커질 수밖에 없는 요인이다.
부르디외의 정의처럼 두 저자는 엘리트 특권계급을 경제자본(돈), 사회자본(관계 네트워크), 문화자본(정신적, 신체적 성향과 지식), 상징자본(수상 경력 같은 구별짓기 표지)을 쌓을 수 있는 사람으로 접근하고 있다. 시비가 붙었을 때 “너 내가 누군지 알아?”라는 갑질 멘트를 던질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다.
특권층은 보수적인 문화, 학술, 자선 기관에 자금을 지원하면서 사회의 중요한 공적 논쟁에서 주도권을 잡는다. 은밀하고 치밀하게 체제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끔 설계하면서 모든 행운을 독차지한다. 놀라운 점은 사회 구성원 모두가 암묵적으로 계층화와 불평등을 강화하는 이른바 ‘특권기계’에 동조하고 있다는 데 있다.
특권이 대물림되는 가장 강력한 장치는 많은 학자가 지적하듯이 교육이다. 우리로 치면 국제학교 같은 상류층 전용 학교인 사립학교에서 어릴 때부터 네트워크를 쌓고 부모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아이비리그라는 좁은 문을 뚫고 들어간다. 그래야만 이들의 성공은 물려받은 게 아니라 실력과 능력으로 포장될 수 있다.
특권층이 배타적 혜택을 받으면 받을수록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은 더욱더 기울 수밖에 없다. 이 책은 이 사실을 극명하고 다소 섬뜩하게 펼쳐 보인다.